▲ 임균택 (전) 대전대 부총장

발해(渤海 : 699-926)는 고구려천자조선유장 대조영(大祚榮)이 창건했는데 발해는 통일신라천자조선봉방으로 숙신씨 후예이며 예맥의 일파이다.. 통일신라와 발해가 고려천자조선으로 통일계승되면서 중앙아시아 외몽고에서 발해를 계승한 고려천자조선봉방글안요(遼)와 이를 계승한 여진인 금(金)과 이를 계승한 몽고인 원(元)으로 다음에서 고려천자조선과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동이주류조선 통일신라의 뒤를 이어 일어난 고구려천자조선유민 발해는 통일신라와 같이 중원대륙을 중심으로 강남 쪽은 통일신라천자조선봉방제후국인 당(唐)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말기에 이르러 당은 통일신라에 흡수되고 그 후 30,000리 대국 천자 고려조선에 의해 발해와 통일신라가 합병되었고 또 5대(五代)를 통합하여 고려는 명실상부 통일천하를 이룩하였다. 개국 초기에 30,000리 대국으로 중원천자나라로 고구려조선을 이어 일어난 때문에 국호를 고려로 도읍을 성도(成都) 즉 개경(開京)이라 했다.

고려는 북에서 고구려 유민 일부가 글안이라 하여 일어났고, 남에는 60여 년 후에 고려천자조선봉방제후국 송(宋)은 국세가 약하여 고려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북쪽의 글안은 발해를 계승하여 일어났는데 국세가 강하여 뒤에 요(遼)라 하고, 고려와 자주 마찰하다가 뒤에 여진(女眞)이 금(金)이라 한 후에 자주 고려와 마찰을 빚었다.

금(金)은 몽고로 계승되어 원(元)이라 하면서 고려는 위축 일로에 들어갔고 원(元)은 강성하였다. 그동안 고려는 성도(成都)에서 서안(西安)으로 천도한 후 글안의 세력에 밀려 평양(平陽)인 분주(汾州) 지역으로 천도되었다가 금(金)의 세력에 밀려 연경(燕京)인 북경(北京)으로 천도했는데 원(元)이 강성하면서 다시 봉천(奉天)으로 천도하였다. 그간에 남쪽의 송(宋)이 망하고 동이지류 지나계(支那系)인 명나라가 홍건적을 이끌고 등장한 주원장에 의해 성립되면서 동이주류 원과 고려는 동시에 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봉천에서 고려는 500여년의 역사를 청산하고 망하면서 이성계는 고려공민천자옥새를 빼앗아 강남지나도적수장주원장에 넘겨주고 간도 한반도 일본열도를 관할하는 유명이씨조선제후로 봉작받고 한반도 개성에서 건국했다가 서울인 한양으로 옮겨 조선왕조를 탄생시켰다.

고려왕조는 중원대륙에서 탄생했고 중원대륙 봉천(奉天)인 심양(瀋陽)에서 망하였다. 그러나 식민 모화사관(慕華史觀)에서 고려의 방역과 고려의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하여 한반도로 축소시키고 그 역사적 사실들을 매몰하였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 이유의 하나로 고려 금속활자 기원 논쟁에서 어시책(御試策) 목판원본을 확인한 결과 중국 학계에서 내세운 반대로 삼장문선(三場文選)안에 어시책이 들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어시책 편찬지가 그동안은 중국 북방이라 했으나 실제로는 남쪽 복건성(福建省)에서 출간된 것으로 밝혀졌고 또 고려 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안남 교지(交趾) 도독으로 있다가 고려가 망할 때 공민왕이 있는 심양에 소환되었고, 망명하여 고려 왕실과 조정중신들을 따라 반도로 이동하면서 이 때 반도 산청에 피난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이 때 고려국토 영역은 방삼만리중원대륙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이제 지명고증을 통하여 그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사실대로 규명함으로써 새로운 고려사의 사관(史觀)을 정립하고자 한다. 이에 우리 모두 한민족(韓民族)이 일어나 그동안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을 분석하고 검토한 후 규명하여 한 점 부끄럼 없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어 자손만대에 한 점 의혹 없는 조상으로서 역사·문화적 제자리를 찾아야할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바이다. 여기에 한 치의 사심이 있을 수 없고 만분의 일이라도 착오가 있어서는 안된다. 인류 역사적 소명을 갖고 밝혀 선양해야 하고 그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으니 한 치의 의혹 없는 역사를 찾는데 총력 매진할 것을 조상 앞에 엄숙히 맹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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