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균택 (전) 대전대 부총장

국사교재편찬회가 펴낸 신고한국사에서 ‘고종(高宗) 19년 (1232) 성중에 방을 붙여 강력히 이거(移去)를 종용하고 제도(諸道)의 백성들에게 산성(山城)과 해도(海島)로 피난을 명령하였다.

강화천도(江華遷都)는 바다를 두려워하는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며, 몽고 측에 적의를 보임과 동시에 장기 항쟁의 각오를 표시한 것이었다. 그곳에 궁궐을 지어 강도(江都)라하고, 이후 40여 년 간 몽고와 대결하였다. 고종(高宗) 19년(1232) 8월 몽장(蒙將) 살례탑(撒禮塔)은 대군을 이끌고 서경(西京)의 반적(叛賊) 홍복원(洪福源)의 응원을 얻어 개경(開京)을 거쳐 한양(漢陽) 산성을 함락하였다.

한강을 건너 처인성(處仁城)인 용인(龍仁)을 공격하던 중 성내에 있던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의 화살에 맞아 살례탑(撒禮塔)이 전사하였다.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의와 함께 서경(西京)을 공벌하여 홍복원(洪福源)의 부와 가족을 사로잡고 서경인(西京人)을 해도(海島)로 이주시키었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강화천도(江華遷都)는 호남성(湖南省)강화현(江華縣)을 일컫는다. 반도(半島)에 있는 강화도(江華島)가 아니다. 또 여기서 서경(西京)은 서안(西安)이며, 개경(開京)은 평양(平陽)이니, 중원대륙 분주(汾州)지역이다. 반도 평양(平壤)이 아니다. 또한 한양성(漢陽城)은 복건성(福建省) 포성현(浦城縣)이며 결코 반도 서울인 한양성(漢陽城)은 아니다.

저작권자 © GNB온세계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