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대전광역시 서구 변동 69-1 천일월드빌)
 

세월이 흐를수록 부모님 은혜가 새록새록 그리워지고 있다.

한 달 전 일이었다. 둘째 며느리인 내가 시어머님의 제사를 지냈다. 올해로 네 번째 돌아오는 제사지만 남편과 나에게는 처음 지내드리는 제사였다.

“어머니...죄송해요...이제야 제사 올려요. 형님과 함께 못 지내고 막내인 제가 지내게 되었네요. 사이좋은 모습 보여야 되는데......정말 잘못했습니다...” 목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삭이며 남편이 탄식했다.

남편과 나는 불효자다. 4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님 첫 제사부터 작년 봄에 돌아가신 시아버님 제사까지 단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서울에 있는 직장에 근무하는 남편이기에 주말부부로 지내는 대전을 거쳐 시댁인 대구까지 가자면 최소한 다섯 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거리이다. 하지만 멀다는 것 역시 핑계다. 온 집안 어른들에게 노여움을 사면서도 가지 않았던 남편의 고집. 그것은 남들에게 말 못할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2남 2녀 중 막내로 우리 부부가 결혼하기 전 아주버님이 이혼을 하셔서 나는 혼자 맏며느리 노릇까지 열심히 했고, 아주버님도 그런 나에게 미안하셨는지 살뜰히 챙겨주셨다. 아주버님은 4년쯤 지나서 조선족 여성과 재혼하셨다. 내가 형님이라 불렀던 맏며느리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였지만 깍듯이 형님 대접을 했던 터라 사이도 좋은 편이었다. 형님 내외는 결혼 당시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사셨지만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차이 때문인지 자주 부모님과 마찰을 빚다가 곧 분가를 하셨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족 간에 금이 가고 시어머님과 불편한 관계가 된 것이.

시어머님은 폐가 굳어지는 병으로 말미암아 일흔 되시던 해 아버님 생신날 돌아가셨고, 다들 평소에 심할 정도로 시부모님과 다툼을 했던 형님을 시어머님 화병의 원인으로 여겼다. 결국 아주버님 내외는 나머지 형제들과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 당시 아버님의 심정이 어떠하셨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 이래가지고는 몬산다. 고마 딱 죽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인자 무슨 낙으로 사나......하루도 더 살고 싶지도 않다카이.”

날마다 이 말을 달고 사시던 아버님. 얼마나 속이 새카맣게 타셨을까.

조선시대에서 살다 오신 것 같은 완고하신 성정으로 자식들을 대하셨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자식들까지 싸움질로 갈라선 터라 사소한 일에도 더 자주 화를 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더군다나 당신 생신날 돌아가셨으니 해마다 돌아오는 그 날이 더욱 괴로우셨을 터이다.

아버님은 자식들을 항상 마뜩찮아 하셨고 역정을 자주 내셔서 그런 아버님께 크게 마음이 상한 남편은 몇 달간 발걸음을 끊었다. 사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 사이에 어머님 첫 제사가 있었는데 남편은 가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내려가지 못했던 나만 시댁 어른들에게 늘 혼이 나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당신 정말 왜 그래? 첫 제사인데도 내려가지 않는 게 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아버님이나 집안 어른들이 이해가 가시겠어?”

나는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남편에게 화풀이를 하고야 말았다. 남편은 묵묵부답이었고 도저히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남편은 다시 아버님을 찾기 시작했지만 다음 해에도 제사에는 참석을 하지 않았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큰며느리도 큰시누이가 준비 해 놓은 제사상에 와서 절만 하고 돌아가는 형편인데 작은아들 내외는 오지도 않으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을 친정에라도 맡기고 혼자라도 갔다 올까 하는 마음에 슬쩍 말을 꺼냈으나 남편은 “혼자서 갔다 올 생각 하려거든 다시 집에 오지도 마라.”라는 말로 일축했다.

그 다음 해에도 역시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챙겨 보내고 겨우 한숨 돌리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큰시누이였다. “올케! 큰 일 났다. 아버지 돌아가셨다....어흑...” 절규하는 시누이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로 어젯밤에도 안부 전화 드렸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었다...... 아버님은 고혈압과 심근경색으로 인해 갑자기 쓰러지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3년을 채우지 못하신 채 뒤를 따라가신 것이다.

‘내가 아무리 나이 들고 늙었어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는 고아다’ 어디선가 읽었던 구절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우리 자식들은 고아가 되었다. 어머님 장례식 때는 병이 나서 입원까지 했던 남편도 한 차례 겪은 탓인지 아버님 장례식에서는 잘 견디는 모습이었다. 아주버님 내외는 그 후 일 년 동안은 명절차례와 어머님 제사를 지내셨고 우리 내외는 어머님 제사에는 역시 가지 않았다.

이제는 꼭 알아야겠기에 제사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를 남편을 다그쳐 물었다.

“내가 모시지 않으면 제사 지내러 가지 않을 거야?”

“아직은 어머니 제사를 지내고 싶지 않아.”

남편은 혼자만의 방식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던 것 같다.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설사 제사를 지낼 마음의 준비가 된 때에도 어머니께 불효한 형과 형수가 올리는 제사에는 가지 않을 생각인 것이었다.

막내로 태어나 큰아들과 차별 대우를 받고 자랐지만 원망은커녕 오히려 부모의 정이 더 고팠었나 보다.
얼마 전 아주버님 내외는 받은 유산이 적다는 이유로 이제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을 테니 절에 모시든지 알아서 하라고 연락해 왔다.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이 아닌가.

아주버님이 제사에서 손을 떼자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 제사는 자기가 모시겠노라고 나섰고 시누이들은 한시름 놓았다며 미안해했다. 남편은 부모님 제사를 모시고 싶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이런 사정으로 우리 내외는 시부모님 제사를 한 번도 지내지 못한 불효자였다.

사실 제사를 지내는 일로 인해 남편과도 사이가 잠깐 소원해졌다. 제사를 모시기 싫다기보다는 아무도 내게 의견을 묻지 않았고 형님네가 돈이 적어서 못 지내겠다는 제사를 군소리 없이 받는 것이 자존심도 상하고 속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심란하고 어지러운 시댁 사정을 친정에 얘기하기도 면목이 서지 않았다. 허나 고민을 끝내고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지내겠어. 자식이 부모님 제사 모시는 건 당연하지 뭐.’하고 속 편히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자 이제까지의 고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괜한 허튼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고 속을 상하게 하고 남편과 소원해진 것이라 생각하니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또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형님 내외와도 다시 잘 지낼 수 있을 것도 같다.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만약 장인어른, 장모님 제사를 모실 사람이 없다면 내가 모실 수도 있어.”

괜한 소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새삼 남편의 말이 고맙게 느껴졌다. 표현은 서툴렀지만 늘 가슴 속 깊이 부모님을 사랑했던 남편의 말이 다시 한 번 떠올라 오늘따라 시부모님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부모님께서 이제까지 낳아주시고 키워주시고 가르쳐 주셨는데 더 이상 뭘 더 해 주시기를 바라겠어.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은혜를 다 갚지 못하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세월이 흐를수록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게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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