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과 효는 국가위기관리의 초석

지금도 일부 젊은 세대 중에는 충효라고 하면 왠지 구시대적이고 진부한 사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가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고, 특히 8·15 광복 이후 자유·평등을 기치로 하는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이 지배함에 따라 재래의 전통적 윤리 규범은 전근대적 봉건 도덕이라 생각하여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 가운데 특히 부자·군신의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인 ‘효(孝)’와 ‘충(忠)’을 민주주의 정신에 반하는 가부장적 봉건 도덕(家父長的 封建 道德)으로 타파의 대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불충과 불효는 일제의 잔재

심지어는 충효사상에서 효는 개인이 집단에 예속된 존재로서 자주성을 상실한 가부장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그리고 충은 같은 맥락에서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을 뜻하는 것으로 크나큰 오류를 범하면서 생활해온 것이다.

이러한 충효사상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로 ‘일본 천황’에게 배례하게 하고, 일본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헌납하게 하면서, 이를 진충보국(盡忠報國)이니 충효일본(忠孝一本)으로 미화하고 장려하려 했던 야만적 작태를 통해 일시적으로 이루어졌던 사건이었으나 우리 국민은 정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아왔고, 지금 현재까지도 일부 야만적인 일본의 지도자들은 그 근성을 버리지 않고 위안부, 독도에 대한 망언을 일삼고 있는 것을 우리 국민은 모두 자각해야 할 것이다.

특히 21세기에 들어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아베신조내각이 들어서면서 떠도는 조선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은 우리국민에게 다시 한 번 제국주의의 근성을 되새기게 하고 경각심을 새롭게 하고 있다.

이 글은 어디에서도 출처를 찾아볼 수 없는 떠도는 내용이나 우리 국민은 항상 되새겨 일본제국주의 근성을 항상 경계하면서 우리국민의 대화합과 총 단결의 기회로 삼아 국가 발전의 초석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기록해 본다.

“우리 일본제국은 패전하였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조선인들이 다시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조선인들은 서로를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아라! 실로 옛 조선은 위대하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은 식민 교육의 노예들의 나라로 전략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참으로 우리 국민에겐 엄청난 치욕스런 내용이라 되새기기엔 거부감이 이루 말할 수 없으나 현재의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지도자들을 생각하면 다시 한 번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 국가발전의 기본정신인 효행이 잘 실천되지 않는 요인을 살펴보면 첫째,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실용주의 교육과 입시위주 출세 지향문제를 들 수 있다. 정치,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일제 식민지지배를 거치면서 전통 문화가 단절되어왔고, 민주적 삶의 방식에 대한 준비 없이 미군정에 의해 밀려오고 도입된 민주주의 정치, 사회, 문화 제도는 혼란과 함께 일대 변혁이었으며, 이런 와중에도 60년대에 들어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국민이 열심히 일하여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면서 학교 교육은 국가 발전의 초석이 돼 왔다.

교육을 많이 받기 위하여 외지로 나가며 부모와 떨어져 공부하게 되고, 한 집에서 공부하더라도 인성교육보다는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살아남아 출세하기 위해 부모에 대한 효심은 멀어지게 되었다. 배우는 내용도 전통사회는 도덕성과 인격완성을 주로 가르치고 배웠으나 오늘날은 전통교육을 소홀히 하고 실용주의 입장에서 기능교육을 강조하고 있으며, 배우는 과정에서 성적과 연계하여 자신의 전문성을 높이려는 데에 집중하다보니, 부모를 잊고 생활하거나 효행을 실천할 마음의 기회조차 잃고 전통윤리의 심각성을 모르고 생활해온 것이다.

교육(敎育)의 한자 ‘敎(교)’ 자를 살펴보면, ‘孝(효도 효)에 攵(두드릴 복)자의 합성어’이다. 교육은 효도부터 가르치고 이어서 기능교육, 좋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모에 대한 효부터 실천하면서 자기의 진로를 생각해야하는 것이다.

둘째, 직업의 다양화와 가정교육의 약화 문제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농경사회가 공업화, 그리고 선진 산업국에로의 진입 등의 변혁을 가져오면서, 직장 중심으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사회를 형성하고, 직업의 다양화로 부자지간의 직업도 가업을 계승하는 경우보다 자녀가 새로운 직업을 택하여 부모와 자녀는 직업이 다른 경우가 많다. 그래도 부모의 정신을 계승하면 좋겠으나 교육비 부담 등 생활의 어려움으로 결혼과 자식 낳기를 거부하며 핵가족화 되면서, 가정교육이 무너지고 어른의 존재와 권위가 무너지고 인구 감소로 인해 나라의 존폐의 위기까지 맞고 있는 것이다.

셋째, 가족과의 유대관계 약화 문제이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직업생활의 보편화로 어머니는 가정에서 머무를 시간이 부족하여 자신이 낳은 자식도 살필 여유가 없는 형편이다.

시부모 모시는 문제는 마음에서 떠나는 추세요, 시집보내는 친정어머니도 우선 몸의 편안함을 추구하여 시집간 딸이 시부모님 모시기를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녀를 둔 부모도 가정교육이 소홀히 된 세대일수록 자식에 대한 가정교육에서 ‘조부모에게 잘하라’, ‘조상님을 잘 모셔야한다‘는 등의 효도 교육은 관심이 적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남녀 독신 생활자가 점차 늘어나면서 노부모가 독신 자녀를 걱정하고 있으며 가족간의 유대관계는 점점 약화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짐승세계에서도 까마귀는 어미 까마귀가 늙으면 새끼 까마귀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여주는 효(반포지효: 反哺之孝)를 실천하거늘 인간으로 태어난 자식이 효행실천과 거리가 멀어져 부모를 모시지 않고, 돌보아드리지도 않고, 양로원에 입원시키고 모르는 체하며 노부모님을 버리는 경우까지 나타나는 상황까지 처한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 국민 모두는 전통윤리의 부재와 인간성의 황폐화로 개인과 집단 이기주의,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를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뿌리 뽑아 동방예의지국으로서의 옛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를 되찾아 동방의 등불이 세계 모든 민족에 활활 타오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효와 충의 실천은 기성세대와 지도자의 몫

우리 기성세대와 지도자들은 충효사상의 본질과 의미를 분명히 재확인하고 이 나라를 짊어질 자라나는 청소년을 지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먼저,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天倫)이라 하여 가장 절실한 인륜으로 꼽는다. 어버이와 자식은 선택이 아닌 운명인 것이다.

그것은 육친(肉親)으로서 혈연으로 맺어진 무조건의 세계이다. 이러한 사랑의 바탕 위에 인격(人格)이 연결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문화적으로 개명된 높은 수준의 도덕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효란 부모의 사랑에 대해 나타내는 자식 된 자의 자각적 행위이다. 그것은 자발적이며, 진실한 인격에서 솟아나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무가내(無可奈)한 심정의 발로이다.

사랑의 체험을 느끼는 경우와 관념적인 의무와는 그 내용이 상이하다. 보편적 인간애를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가장 가깝고 절실한 것으로 ‘확충(擴充)’해 갈 때 비로소 실질적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다.

맹자는 “어버이를 친함으로부터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며,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다시 만물을 애호하게 되는 것이다(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라고 하였다.

인간관계의 보편성을 지향하되 개개의 특수한 상황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다면 나의 부모 모시는 효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천하가 일가(一家)요 나라 사람이 일인(一人)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는 특수한 개별자의 입장을 중시하더라도 사해동포(四海同胞)로서 인간적인 보편성을 이해할 수 있다면, 비록 친소(親疎)의 실정이 다르고 인격적으로 귀천의 등급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기 개인의 사사로움에 얽매이지(爲我) 않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朱子, 西銘註).

특수한 개별적인 행위는 그 자체로 제한되지 않고, 보편성을 지향하여 연결, 성장될 때, 비로소 보편성과 특수성이 괴리하지 않고 서로 조화되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족의 효에서 국민의 애국정신인 충으로, 그것이 다시 인류의 평화로 이어지는 연속적 유기적 통로가 열리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폐쇄적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로 기우는 것은 올바른 충효사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효란 충으로 연결되고 있으니, ‘내 집’과 ‘내 나라’를 수호한다고 하는 충효사상은 민족을 오랜 역사를 통해 내우외환으로부터 보존해 온 근원적 사상이자, 민족 문화를 유지, 발전시켜온 근원적 동력이었다. 혈연적인 혈통과 문화적인 전통의 결합은 민족적 차원에서 효의 이념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할 것이다.
≪중용≫에 의하면, 공자는 “효란 부모(父母), 조상(祖上)의 뜻을 잘 계승함이요, 사람의 일을 잘 행하는 것(繼志述事)”이라 하였고,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이것을 풀이하여 “조(祖)·부(父)가 행하고자 했으나 미처 행하지 못한 것을 자손이 그 뜻을 잘 계승하여 성취하며, 조·부가 이미 행한 것으로서 본받을 만한 것이 있으면 자손이 그 사업을 토대로 하여 좇아서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 정신문화를 계승하여 발전적으로 수행해 가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켜 가는 것도 ‘뜻을 받들어 잇는 것’이려니와 마땅히 변경할 것을 변경하는 것도 또한 ‘뜻을 받들어 잇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효 사상의 해석에는 조상의 것이라 하여 맹목적으로 목수함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시대적 상황에 알맞게 대응 처리하여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충과 효는 민족적 차원에서 국권을 수호하고 민족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이념으로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셋째, 전통 사회에 있어서 충효사상은 실제적 운용에 있어서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하고, 사회적 개방성보다는 가족적 폐쇄성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현대 시민 사회에 있어서는 개인의 자주성 및 평등한 인간관계가 주창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개인주의에서 오는 인간관계의 냉각과 고립화, 원자화 현상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여기에 친애의 정으로 결합되는 부자자효(父慈子孝)의 도덕성에 대한 성찰이 다시금 요망되고 있는 것이다.

친자 관계의 부실(不實)은 왜곡된 인간상을 산출하고, 그것은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편적 인간애를 지향하더라도 인간애의 근원으로서의 혈연적 유대를 망각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본심을 매개로 한 것이 아니므로 영속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현대적 의미에서 충효사상은 개인적으로 자주 의식을 지닌 각성된 인간 주체가 어떻게 자발적으로 협동하고 상호 부조하며, 공공 정신을 발휘하여 공동체 의식을 회복할 수 있으며, 어떻게 민족적 역량이 내부로부터 성장 성숙해 갈 수 있겠는가를 묻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충과 효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숭경심으로서의 종교적 정신에까지 승화되고 형제간의 우애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사회성과 세계성으로 확대되는 방향으로 성찰해서 가정의 행복, 국가의 발전, 나아가 세계 인류 평화의 길을 모색해 나아가는 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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