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문도의 해돋이 -

▲ 안태승 수필가.(전)대전노은고 교장

거문도에도 여명이 밝아온다.

해돋이를 보려고 일찍 일어나 거문도항(고도)에서 배를 타고 서도의 남쪽 수월산(水越山) 끝자락 무넘이재 아래에서 내려 ‘거문도 등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원시림에 가까운 오래된 굵고 큰 동백나무들이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동백나무 터널로 이루어진 비탈길을 따라 1km 가량 걸어서 ‘거문도 등대’에 이르렀다. 수월산(128m) 남쪽 끝에 있는 이 등대는 1905년 개설되었고 불빛이 무려 40Km까지 나가는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현재 세 명의 등대지기가 근무하고 있다. 흰 원통모양의 등대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등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마주하고 서 있노라면 내 자신이 등대가 된 듯 아름다운 조망에 미동조차 할 수 없다. 밀물이 “쏴~”하고 거칠게 파도를 일으키며 몰려온다.

일행들과 함께 등대에서 나와 그 옆의 전망대 觀白亭에 오른다. 동편이 환하게 밝아오자 거무스레한 구름이 보랏빛 구름으로 변한다. 점점 엷은 포돗빛에서 불그스레하게 변해 가자 저 포돗빛 구름을 하얀 모시 베로 짜면 포도즙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이윽고 수평선에서 새빨간 혓바닥 끝이 낼름거리듯 내민다. 점점 조금씩 위로 밀어 올린다. 잠시 구름이 가리는가 싶더니 둥근 불덩이가 힘차게 솟아오른다. 눈부시게 찬란한 햇살이 온 누리에 퍼져 나간다. 밝은 햇살이 쏟아지며 하루를 연다. 해돋이 모습이 정말 황홀하다. 해를 바라보며 두 손 모아 소망을 빌어본다. 이른 새벽에 비탈길을 오른 보람을 맛보게 되어 기쁘다. 이슬을 머금은 소나무 숲은 더 푸름에 젖어 있다. 전망대에서 발아래를 굽어보니 흰 뭉게구름이 뒤덮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구름은 변덕스럽게 재주를 부린다. 저 만큼 외따로 떨어져 있는 무인도 돌섬을 가리고 있던 엷은 구름이 벗겨지려는가 하면, 다시 덮이곤 했다. 아마도 돌섬은 파도와 비바람에 상처 난 몸뚱이를 우리에게 보이는 게 부끄러운가 보다.

거문도 등대와 전망대를 뒤로 하고 능선을 따라 보로봉과 신선바위를 지나 억새군락지에 이르렀다. 햇살의 눈부심에 바라보는 억새꽃은 은빛날개를 달고 바람 따라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어디론가 떠날 준비가 한창이다. 억새꽃이 출렁이는 날갯짓을 바라보며 비탈길로 내려와 삼호교를 향해 걷는다. 산자락에 하얀 구절초 꽃들이 무리지어 손짓한다. 여행객들의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셔 준다. 누가 길가 산자락에 한 무더기의 돌탑을 쌓아 소망을 빌었을까? 그 작은 소망들이 숲 속에 기웃거리다 하늘에 닿았을까? 나도 탑 위에 돌 하나 올려놓고 작은 소망 하나 빌어본다.

삼호교를 건너 거문도(고도)로 내려왔다. 19세기 말, 영국군에게 불법 점령당한 우리 역사의 아픈 흔적인 ‘영국군 묘지’가 거문초등학교 뒤 산등성이 남향받이에 남아 있다. 그 자리엔 ‘1903년 10월 죽은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 잠들다.’는 내용이 적힌 나무 십자가 하나와 평분이, 그리고 1866년 3월 폭발사고로 죽어 평분에 묻힌 두 명의 수병에 대한 내용이 새겨진 동판이 고즈넉하다. 바다에선 고기잡이하는 어부들의 ‘거문도 뱃노래’가 들려올 것만 같다.

거문도항에서 일정을 마치고 여수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남해의 푸른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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