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영 작가.칼럼니스트

하루 15분의 명상이 100세 이상의 장수를 누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어느 미국학자의 말이 있다. 명상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체에 매우 유익한 것이라는 것이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흔히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는 무아지경에서 자신을 생생하게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른바 불교에서 득도(得道)하기 위해 고행하는 좌선(坐禪)이나, 기독교에서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소망을 이루려는 기도의 시간만큼은 모두가 명상이라는 명제 앞에서 맥을 함께 하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요즘같이 하루 종일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에게는 그야말로 자신을 어렴풋이나마 되돌아 볼 수 있는 순간의 진실이 절실하다. 새벽잠에서 깨어나 밤늦게야 피곤한 눈을 붙이는 시간까지 우리는 하루 동안의 내 자신을 조용히 살펴 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흔치않다.

길 가는 수백만 명 아니 수천 명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물어보고 싶다. 단 일분이라도 명상하는 시간을 갖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느냐고.

우리가 억지로라도 명상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옛날 중국의 공자(孔子)는 나이 40이 되어서야 비로소 불혹(不惑)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했다. 나이 70~80세가 되어도 철들지 않은 사람들이 사람의 가죽을 쓰고 우리가 사는 주변에서 날이면 날마다 판을 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현대인들이 사람 되기 위해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을 과연 얼마만큼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면서 경박하고 고약한 심성을 드러냄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줄곧 미움의 세계로 이끌고 가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불손하고 오만방자한 자신을 인식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이 모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날처럼 복잡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리고 불확실한 사회에 불우하게 살면서 구태여 도덕관념을 지키려 어느 누가 애를 쓸 것인가. 양화를 만지는 사람을 악화를 만지는 사람들이 마구 쫓아내려 하는 세상을 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분통이 터진다.

세상이 우리들을 우울하게 만들며 외롭게 만들 때 혼자만의 명상에 잠겨 보라. 그 이상 마음의 보약이 또 있겠는가.

오늘도 고성낙일(孤城落日)의 심정으로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명상의 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는 사람들이 날마다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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