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균택 (전) 대전대 부총장

김부식(金富軾)

국사교재편찬회가 펴낸 신고한국사에서 ‘김부식은 고려인종(仁宗:17대 1123-1146년)때 묘청(妙淸)의 서경천도(西京遷都)와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에 반대했고, 1135년에 묘청반군(妙淸反軍)진압, 서경정토대장(西京征討大將)으로 출정하여 다음해에 평정했다.’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개경(開京)인 송도(松都)는 한반도의 서쪽 끝이다. 그렇다면 서경(西京)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한반도의 경우 경주(慶州)는 동남쪽이고 한양(漢陽)인 서울은 남쪽이며 평양(平壤)은 북쪽이다. 때문에 한반도 송도 개경에서 서쪽은 황해 건너 산동반도(山東半島)이다. 때문에 여기서 지적한 서경(西京)은 대륙 평양(平陽)인 분주(汾州) 서쪽인 서안(西安)을 서경(西京)이라 한 것이다. 이때 고려의 왕도(王都)는 대륙 분주(汾州)인 평양(平陽)이다.

서희(徐熙)

국사교재편찬회가 펴낸 신고한국사에서 ‘서희는 고려성종(成宗) 12년 (993년)에 글안 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으로 고려의 서북경(西北境)으로 부터 침략하자 일부 신하들이 서계(西界)의 땅을 할양하고 화친을 주장했으나 이를 반대하고 드디어 글안을 물리쳤다.’ 했는데 여기서도 서계는 대륙서안서북쪽이다. 고려왕도는 사천성(四川省) 성도인 개경을 말한다. 그리고, 글안(契円)의 본거지는 고려의 서북면인 청해(靑海)와 감숙(甘肅)이였는데 본시 고구려 땅이었다.

강감찬(姜邯贊)

국사교재편찬회가 펴낸 신고한국사에서 ‘강감찬은 고려 현종1년(1010년)에 글안의 성종(成宗)이 40만군으로 쳐들어 왔을 때 물리쳤다. 그 공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차례로 역임했고, 현종 9년 1018년에 글안 소배압(蕭排押)이 고려를 또 침범했을 때 서북면(西北面)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 장군이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20만 8천명의 군사로 적의 후면을 공격하여 구주에서 섬멸시켰다. 이때 적의 시체는 석천(石川-황화천(皇華川)에서 반령(盤嶺-팔영령(八營嶺))에 이르기까지 들을 덮었으며,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고 돌아오니, 왕이 친히 영파역(迎破驛)까지 환영했으며 그 공으로 추충협모안국(推忠協謀安國)공신(功臣)의 호를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서경유수(西京留守) 직책과 서북면 행영도통사의 전적지는 한반도의 개경이 아니라 위치가 중원대륙서안서북쪽이다. 때문에 서경(西京)유수와 서북면은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을 가리킨다. 그 당시 글안은 고구려 발해유민 일부가 감숙성 주변을 중심으로 일어나 고려방역인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을 공략했던 때문에 강감찬이 서경유수(西京留守)에 제수되어 그곳을 지켰고 또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서북면을 지켰던 것이다. 강감찬 장군이 살던 시대에 반도에는 서북면이 없다. 동북면이라면 강원도 함경남북도 길림성까지 포함된다 하겠으나 서북면은 황해건너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인 요녕성과 연경(燕京)인 북경(北京)지역 주변인 분주(汾州) 평양(平陽)뿐이다. 또 서북면이라면 서는 황해바다이고 북은 평안도와 신의주뿐이다. 따라서 이때 고려왕도는 사천성 성도인 개경 또는 서안(西安)으로 이곳을 경주라고도 했다. 따라서 역사고증에서 조선조 홍봉한의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한반도 서북면, 동북면이란 이씨조선 태종 이방원 4년에 비로소 평안남북도를 서북면, 함경남북도를 동북면이라 칭한 것이 최초의 명칭일 뿐이며 고려 때의 명칭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서안이다.

강감찬 장군의 구주(龜州)는 사천성(四川省) 부능현(涪陵縣) 동쪽에 있다. 여지기승(與地紀勝)에는 령강(齡江) 동쪽 변두리에 있다 했고, 주(州)가 다스렸는데 구주(龜州)는 그 상부(上部)에 자리 잡았다. 그 형상이 구(龜)와 같아서 그곳을 구주(龜州)라 하였고, 구능(龜陵)이라고도 하였다. 일명 삼태산(三台山)이라했다. 구화성(龜化城)은 사천성(四川省) 성도현(成都縣)에 있는 성(城)이다. 수신기(搜神記)에는 진(秦) 혜왕(惠王) 27년 장의(張儀)로 하여금 성도성(成都城)을 축조케 했다. 루경(屢傾)에서 보면 홀연 대구(大龜)가 강에 떠있는 것같이 되었다하여 구(龜)라 하였고 구주(龜州)라 하였다. 또 부능강(涪陵江)은 귀주(貴州) 오강(烏江) 하류(下流)이다. 귀주(貴州)로부터 사천팽수현(四川彭水縣) 경계(境界)로 들어간다. 또 부능현(涪陵縣)에 이르러 강으로 흐른다. 수경(水經)에 강수(江水)가 지현(枳縣) 서쪽에 이른다 했고 또 강이 뻗어 흘러 장가(牂牁) 군(郡) 북쪽에서 서쪽 굴주지(屈注之)로 흐른다. 물(水)이 강(江)의 지류(枝流) 나루로 뻗어 흐른다. 따라서 물이 북주(北注)로 나누어 흐르며, 부능(涪陵)을 경유하여 강으로 들어간다. 그런 까닭으로 부능수(涪陵水)라 하였다. 또 부강(涪江)은 내강(內江)이라고도 하는데, 내수(內水)라고도 한다. 원래 부강(涪江)은 사천송번현(四川松潘縣) 동북(東北) 설란산(雪欄山)에서 나온다. 또 부능군(涪陵郡)은 지금 사천(四川) 팽수현(彭水縣)에서 다스린다. 따라서 사천성 부능현(涪陵縣) 동남에 있다. 강감찬(姜邯贊)은 이홍직(李弘稙) 국사대사전 26쪽에 ‘948년 정종 3년-1031년(현종22년) 고려의 명장으로 1010년(현종1년) 글안의 성종(聖宗)이 40만군으로 침입했을 때 물리쳤고, 1018년(현종9년) 글안 성종이 재침했을 때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20만 8천군으로 구주(龜州)에서 섬멸시켰다고 했는데 바로 이 구주(龜州)가 반도가 아닌 중원 사천성(四川省) 부능현(涪陵縣) 동쪽이며 부능강(涪陵江)주변이고, 부능현(涪陵縣)은 귀주(貴州) 오강(烏江) 하류(下流)이다. 참으로 참담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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