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부흥은 일본인의 정신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정신을 말한다면 누구나 무사도(武士道)를 들고 있는데 17세기 전에는 궁마지도(弓馬之道), 병지도(兵之道)라고 불려졌다. 일본사(日本史)에서는 무사의 기원을 10세기경 장원(莊園)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인(私用人)을 무장시켜 경비를 맡기는 데서 시작하였다고 하나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적지 않다. 그들의 비조(飛鳥: 아스까) 문화, 평안(平安: 헤이안)문화는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이전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 신라와 당(唐)에 복속되지 않으려 했던 고구려 귀족들과 유민들이 일본으로 대거 이동하였다. 그 당시 인솔자가 약광(若光)이란 이름의 고구려 장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일본사람들은 고구려 유민들을 별세계에서 온 신인(神人)인양 매우 공경하였다고 한다. 일본 천황(天皇)의 혈통이 한반도(韓半島)에서 비롯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과연 일본의 검법과 무사도는 참으로 일본의 고유한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의 것인가? 저자는 일본의 고대역사서(古代歷史書)인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부터 엄밀히 분석해본 결과 후자에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사실 일본인의 정신력은 대단하였다. 태평양 전쟁 때에도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독자적으로 원폭연구를 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누구나 암송(暗誦)하는 구절이 있다. 「첫째 나의 충성에 변함이 있는가 없는가? 둘째 나의 생명에 미련이 있는가 없는가? 셋째 나의 임무에 소홀함이 있는가 없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을 꼭 자신에게 물어본다. 백 마디의 정신훈화보다도 이 세 가지 암송이 훨씬 더 폐부를 찌른다. 일본인이 전쟁직후에 당한 수모는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치욕이 되는 일이 한 두지가 아니었다. 정부에서 미군과 동거할 사람을 구하는 광고를 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의 재건이라는 목표에는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였다. 특히 구(舊) 일본군 출신의 엘리트와 공무원들은 참으로 모범적이었다. 일본의 오늘을 만든 핵심 그룹들이라 할 수 있다. 다나까(田中) 전수상의 록히드 뇌물사건에도 정치인들은 개입된 사실이 있으나 관료는 한명도 개입되지 않았다. 대장성(大藏省)의 실무관료는 일본 대기업의 실무자들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에 완전히 대기업을 휘어잡고 정책대로 이끌어 간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과장급들이라 베테랑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 사회에서는 학자나 기술자 하다못해 목수한 사람까지도 자식 없는 것은 큰 부끄러움이 아니나, 제자 없는 것은 큰 부끄러움이 된다. 열처리기술이 부족하였을 때, 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외국에 나간 한 학생은 중간 과정에서의 노하우(Know How)와 금속온도를 알기 위해서 달아오른 쇠를 만져 화상을 입혀 귀국하기까지 하였다. 고열에 의한 화상은 역으로 조사하여 결국 온도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인의 정신력은 우리로서는 강 너머 불구경 하듯이 도저히 그냥 볼 수 없는 입장이라 하겠다.

저작권자 © GNB온세계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